주내감리교회

2018년 5월20일 주일예배

말씀 ; 내 중심적인 믿음을 내려놓으면
성경말씀 : ……………1:16-17

18세기 미국은 인디언과 각국에서 이민 온 사람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할 선교사들이 필요했습니다. 이에 영국교회는 ‘존 웨슬리목사님’을 적임자로 선발하였죠. 1735년 10월 14일 출항하여 ‘죠지아주 사바나’항에 도착하기까지 57일간의 긴 항해를 했습니다. 그동안 큰 풍랑을 만나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되자 죽음의 공포를 느껴습니다. 그 배에 동승한 독일인 ‘모라비안’ 교파의 교인들은 태연하게 찬송을 부르고 있는 것을 지켜본 웨슬리는 자기신앙이 그들에 비교해서 아주 미약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들과 깊은 사귐을 통해서 신앙의 많은 도움을 받는 가운데 미국에 도착하여 북미 선교사업에 심혈을 다하여 전도하였으나 주민들에게 배척을 받고 2년만에 영국으로 돌아옵니다. 미국에서 돌아온 지 4개월 째 되던 날 1738년 5월 24일 저녁 때였습니다. 올더스게이트(Aldersgate)라는 곳에서 모라비안 교도들의 작은 기도처의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어떤 사람이 마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있었습니다. 웨슬리는 그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듣고 있다가 회심의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성령충만한 은혜의 복음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분은 ‘전세계는 나의 교구이다’라고 외치며 대 전도운동을 전개하여 놀라운 복음주의적인 부흥을 가져와 영국 사회를 변화시켰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을 얻게 됩니다. 그 믿음은 죄를 용서해 주심에 대한 확신(칭의)과 영생의 사람으로 새사람이 된 확신(중생)이었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인 회개를 고백합니다.

첫째, 종교적 우월감입니다.–목사의 아들, 영국 성공회 신부, 선교사

둘째,학문적 우월감—옥스포드 대학 출신 셋째,그리스도 없는 열심 넷째, 조지아에서의 2년 4개월 동안 율법적이고, 인간적이었으며 귀족적이었던 선교자세등. 웨슬리목사님은 일기속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내가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있다고 느꼈으며 구원을 위해 다만 그리스도만 믿고 있음과 그 위에 주께서 나의 죄를, 아니 나의 죄까지도, 다 거두어 가시고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건져 주셨음을 믿는 확신이 나에게 주어졌다

기독교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은총을 만나게 될 때 비로서 새로운 존재가 됩니다. 웨슬리는 회심을 통하여 그분의 삶이 하나님을 향하여 뉴턴(new-turn)하게 되었습니다. 웨슬리는 이때부터 나를 구원해 주신 예수를 담대히 전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첫째, 성령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웨슬리는 모든 영적 운동은 성령의 역사로 가능하다고 선포합니다. 자신의 지식, 경험, 열심을 내려놓고 오직 성령님을 의지하고, 성령의 불같은 은혜와 은사를 힘입어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신앙의 성장이나 변화는 성령으로 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둘째,말씀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웨슬리는 감리교인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네가지 균형 즉 성경, 전통, 경험, 이성이죠. 이 네 가지가 균형있게 갖추어진 그리스도인을 강조했고,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이라고 합니다. 세째로 이웃사랑 실천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산업혁명으로 영국사회는 물질주의의 영향으로 사회 양극화와 온갖 부정 부패, 탈법, 타락이 판을 치고 있었습니다. 피의 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 가운데 있었지만, 웨슬리 목사님의 이웃 사랑 실천운동으로 영국 사회가 무혈혁명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웨슬리의 정신을 이어받은 감리교는 처음부터 빈민구제운동, 금주운동, 학교와 병원을 세워 불우한 사람을 가르치고 치료하였으며, 형무소를 찾아가 전도하였고, 노예해방 운동을 하였으며, 사회로부터 소외된 계층과 노동자, 농민을 상대로 도움을 아낌없이 베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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