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내감리교회

2018년 9월 16일 주일예배 설교 말씀

고린도전서 2장1절~5절

“어떻게 주님을 증거 할까”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1.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않았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 가운데 헬라 철학자들처럼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 많지 못하다는 겁니다. 2. 능한 자가 많지 않았습니다. 능한 자란, 정치적으로 권력이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에는, 권세 있는 정치인들이 많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복음은 결코 힘있고 권력있는 정치가의 후원 하에 선포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힘없는 서민들에 의해 전파되었습니다. 3.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에 상류계급 출신이 많지 않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기준은, 외모나 학식, 재능, 물질과 같은 외적인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즉 학식이나 재산, 출신 성분 등은, 세상적인 지혜에 의한 가치 판단의 기준일 뿐, 인간의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된 것입니다.

지혜, 권세, 부귀는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아름답습니다. 인간들은 모두 그것을 흠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혜 자나, 권세 자나, 상류층을 즐겨 택하시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거기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는 마음이 없을 확률이 높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들은 이러한 세상적인 지혜와 권세와 부귀영화로, 하나님을 멸시하고 대적하기도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능하고 문벌 좋은 자보다, 미련하고, 약하고, 천하고 없는 것들을 즐겨 택하여 쓰실까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29절)”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서 전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이란, 헬라의 웅변이나 철학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웅변조나 철학적으로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름다운 표현과 고상한 생각으로, 청중의 마음을 즐겁게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전도자였지, 수사학자나 철학자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고린도에 간 유일한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전할 때,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만을 전했습니다. 인간의 하잘 것 없는 지식에 의존하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곧 피의 복음, 구원의 복음, 생명의 복음만을 단순하게 전했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에, 지혜로 유혹하는 말, 근사한 말, 아름다운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과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했습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이 성령의 능력과,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한 것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같은 바울의 전도는 성령의 능력 있는 증거로, 많은 열매와 커다란 변화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구원받게 된 성도들은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 곧 우리의 죄를 대속키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럴 때에는 전적으로 성령의 능력에 의지해야 합니다. 말주변이 없다, 지식이 없다, 혹은 용기가 없다는 식으로, 전도를 포기하거나 기피하지말고 성령님의 능력에 의지해서 주님을 전하는 삶을 사기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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